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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

봄날장미 2021. 7. 21. 19:03

거미

 

                                          이면우

 

 

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니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떠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을 안다

캄캄한 배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속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집『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2001)

 

거미

                        김금하


한 채

허공에 떠있다

 

허방에 걸린

저 얇디얇은

 

투망에

목숨이 걸려있다


바람이 철썩

삐거덕

집 한 채 출렁인다


아찔하다

산다는 게

 

 

거미

                                조말선

 

 

나는 생각한다

가랑이가 낳은 집에 대해서

유행에 둔한 건축법에 대해서

실오라기 하나로 이어온 가계에 대해서

이슬의 동그란 노크에 대해서

거꾸로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미줄에 포박된 우주에 대해서

나는 가랑이로 생각한다

나를 낳은 기둥과 기둥에 대해서

폐허에 찍은 내 낙관에 대해서

외줄에 매달린 생애에 대해서

매번 마지막인 사랑에 대해서

창밖에 내걸린 사랑의 수의에 대해서

마지막을 유감 없이 처리하는 내 본성에 대해서

나는 가랑이로 배설한다

족보와

사랑과

무덤과

 

거미, 혹은 언어의 감옥

                                                       유하

 

 

외로움의 힘으로 집을 짓는다 몸의 내부 깊은 곳
음습한 욕망을 나는 은빛 유혹으로 바꿀 줄 안다
꽁무니에서 나오는 가녀린 실의 끈적거림
나는 그만큼 삶에 집착한다 그러니까
내 집은 내 욕망의 무늬이자 미로인 셈이다
내가 풀어 놓은 무늬에 때론 내가 헤매기도 하기에,
오늘은 하루종일 하루종일 하루살이를 기다렸다 세상의 온갖 방황도
내 집에 갇힌 이상, 내 좋은 대리 경험의 양분일 뿐이다
먹이는 고스란히 내 집의 실기둥으로 뽑혀져 나온다
먹이들의 살과 뼈를 원료로 이루어진 집,
나는 안다 자기 몸이 결국 자기 덫이었음을
적어도 나는 그 죽음의 덫을 내 식으로 육화시킬 줄 아는

교활함을 지녔다..... 저주받았으므로, 난 즐겁다
자, 내 분신 같은 새끼들아, 날 남김없이 먹어 해치워 다오
난 내 욕망의 무늬를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싶다
그리하여 모든 너 안에 내가 살고 싶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임영석


미는 밤마다 어둠을 끌어다가
나뭇가지에 묶는다 하루 이틀
묶어 본 솜씨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어둠을 묶어 놓겠다고
거미줄을 풀어 나뭇가지에 묶는다
어둠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나뭇가지가 휘어져도
그 휘어진 나뭇가지에 어둠을 또 묶는다
묶인 어둠 속에서 별들이 떠오른다
거미가 어둠을 꽁꽁 묶어 놓아야
그 어둠 속으로 별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미가 수천 년 동안 어둠을 묶어 온 사연만큼
나뭇가지가 남쪽으로 늘어져 있는 사연이
궁금해졌다 무엇일가 생각해 보니
따뜻한 남쪽으로 별들이 떠오르게
너무 많은 어둠을 남쪽으로만 묶었던
거미의 습관 때문에 나무도 남쪽으로만
나뭇가지를 키워 왔는가 보다 이젠 모든 것들이
혼자서도 어둠을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수천 년 동안 거미가 가르친
어둠을 묶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거미는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뜨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나 보다

 

거미박물관

                                           박설희

 

 

어떻게 알았니 거미야

너는 속에서 뽑아낸 실을 외부에 내걸지만

나는 내 속에 촘촘히 건단다

어떤 유혹과 갈망이라도 포획할

한땀 한땀

 

속에서 자라는 팔닥이는 것들

나비 같고 하루살이 같고 불나방 같은 것들을

스스로 그물을 쳐

잡아먹는 습성

들키지 않으려는 습성

 

몇 개의 줄을 쳤는지

어떤 바람이 불어 찢겨져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과부거미도 타란튤라도

평생 뜨거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데

 

손바닥 위에 거미를 올려놓는다, 그득하다

몸통과 다리에 털이 많아 보드랍고 따스한 그것

숨죽이고 있다

 

내 체온과 혈관 속 피의 흐름을 가늠하는 듯하다

몸속 거미줄을 찾고 있는 듯하다

 

거미 / 김수영(1921~1968)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거미의 각도

                                                          김도이

 

 

몸을 풀은 공중에서 낯선 당신을 견뎌냈다

 

우울증을 앓던 여자가 폐기물인 양 창 밖으로 아이를 던졌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아이는 각에 걸렸고 패스! 라고 외치며 여자는 거꾸로 뛰어 내렸다 사람들은 일제히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구급차가 아슬아슬 펼쳐졌지만 당신의 계산법은 치명적이어서 아이와 여자는 허공인 채 봉분이 된다

 

바람을 잡아당기면 공중이 어긋나서

삐끗 금 간 독들이 욱신거렸다

 

밤의 꽁무니는 무지해 아무 곳으로나 몸을 풀고 모퉁이에 많은 것을 감추려든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아침의 방향으로 햇빛을 다시 재단한다 많은 것은 많은 것을 잃고, 나를 비껴나간 곳

 

끊어질 듯

성급한 날개가 끈끈한 각도에 한 끼 식사처럼 걸려있다

허공은 깊게 파여 껍데기뿐인 나를 먹으러 이곳으로 왔다

없는 나뭇가지는 혈관으로 얽혀있고 비행을 멈춘 당신

날아갈 공간도 없이 굳고 있는 나를 본다

 

달빛과 거미 / 안행덕

 

 

열이레 달빛이 처마 밑 어둠을 밀어낸다

어둠에 익숙한 거미 한 마리

조심스러운 사냥을 꿈꾼다

조심조심 묶어둔 거미줄에 걸린 환한 달빛

살아서 퍼덕거린다

한번 걸린 먹이는 놓아 줄 수 없다는 듯

예리한 발톱으로 줄을 당긴다

출렁,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날렵하다

풍경도 없이 사라지는 척

바람에 흔들리는 달빛을

슬쩍 바람 사이에 가볍게 옭아맨다

그렁그렁한 슬픔 하나 어둠에 매달아 놓고

보이지 않는 덫으로 달빛을 유혹한다.

 

거미의 삶

                                           이 원 문

 

석양의 저녁이면

이리 저리 걸치는 줄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저 곳에서 이 곳으로

보기에는 엉성해도

사이 간격 촘촘하다

 

날벌레의 저녁 시간

활동의 그 시간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크고 작은 먹잇감

무엇이 걸려들어

먹잇감이 될까

 

웅크리고 기다리는

거미의 기다림

한 끼니 거미의 시간

또 하루의 밤이 된다

 

거미줄 혹은 거미집

                                    정민기


빈 곳은 언제나 거미줄 혹은
거미집이 차지하고 있다 천 년의
무늬가 있는 비단 솜이불
찾아온 손님에게 비단 솜이불을
기꺼이 내어준다 3월을 깨우는
봄비가 내리고 거미집 창문에
진주목걸이가 치장되었다
실젖 안쪽에서 실을 뽑아다가
한 벌의 모시옷을 입혀준다
사방으로 뻗은 거미줄을 보고
두 팔과 두 다리를 묶은
수레를 달리게 한 거열형을
생각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거미가 거열형을 당하고 있다

 

거미집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 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 떼 돌돌 말아 던져 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 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가 같은 집은 비바
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산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 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
림까지 중앙 로타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 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거미의 생각 /손계 차영섭

 

집을 짓기 위하여

인간보다 먼저 network을 어부의 그물망 형태로

구성할 생각을 한다

벌레들이 다니는 목을 정찰하고

건축 설계를 한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까지 허공에

기둥을 세우고 원형 망과 서까래를

계산하고 모든 자재는 자기 몸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못 대신 매듭으로 묶고

점성이 있는 줄과 없는 줄을 뽑아

자재로 사용한다

대기 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진동을 기다린다

 

벌이나 개미의 집단행동과는 달리

거미는 홀로 짓고 홀로 산다

허기를 참으며 먹잇감을 기다리는

거미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다.

 

거미

 

                           권정순

 

나, 자유롭습니다

좁은 이 한 곳에서

먼 곳을 떠나지 못해도

 

나, 자유롭습니다

이 한 곳만을 지키며

이 한 곳에만 메어 있어도

 

나, 행복합니다

스스로 떠나지 않고

스스로 메어 있기에

 

나, 행복합니다

넓은 세상 오게 해준다 해도

아니아니, 이대로 끝이 온다 해도

영원히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나. 자유로워 하며 행복해 하렵니다.

 

 

세상을 혼자 산다는 것은
너무도 쓸쓸한 일이다
가슴 속까지 빤히 들여다 보고
물살처럼 빠져 나가는 외로움을
작은 가슴 하나로 받아 내는 일은
때론 눈물에 겨운 일이다

하염없이 흐드러지며
눈 앞을 내 뒹구는 햇살 몇 줄기에도
그림자 길게 늘어 뜨리고
무심코 불어 오는 찬 바람에도
몸서리 치게 추운 것이기에
어쩌면 세상을 혼자 산다는 것은
무모한 오만인지도 모른다

그리워 할수 있을때 사랑해야 한다
다하지 못한 말 언저리 깊게
배어 내어 주절주절 뱉어도 내어야 한다
가슴 시리도록 허전해 오면 목 놓아
이름도 불러 보고 못 견디게 보고픈 사람은
찾아도 보아야 한다

가끔은 무작정 달려가 부등켜 안아도 보고
그렇게 함께 할수 있다는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느껴도 보아야 한다

ㅡ 문득 그리운 사람이 있거든 중에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