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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 ---------- 200mm

봄날장미 2013. 1. 9. 13:42

 

 

 

 

 

 

      낮은 목소리로            / 박정만


  산정에 올라오면 먼저 머물 자리를 마련한다.
  금년의 나는 지난 해의 내가 아니므로
  자리도 새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억새밭에 자릴 잡았다.
  먼 산정에는 어느덧 억새꽃이 무성하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나서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산 너머로 해는 지고
  장엄한 어둠이 살에 스미는 것을 느낀다.
 
  삽시간에 별들이 돋았다.
  사람의 눈매가 그렇듯이
  어떤 별은 글썽글썽 눈물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별밤엔 혼자서 무엇을 하나.
 
  나는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더욱 낮게
  풀뿌리까지 닿도록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 울던 날           / 는개


   모질게 울던 바람이었습니다.
  산중턱 산발한 억새들이
  가슴 파이는 줄도 모르고
  달래보겠다고
  안아보겠다고
  무던히도 흔들렸지요.
 
  억새들의 패인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무릎 꿇은 사랑이
  자꾸만 희게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깊게 울었구요.
 
  고연 녀석,
  외롭다고는 죽어도 말하지 않을 거면서
  외로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울면
  정작 외로워 부대끼다 말라버린
  억새들의 빈 가슴은 어쩌라는 것인지.
 
  저마다 생채기 하나씩은
  미처 아물지 않아
  붉은 눈동자로
  차가운 계곡을 더듬던 나무들도
  억새의 순정에
  뿌리를 오므렸습니다.
  그들이라고 그 안타까움을
  왜 모를려구요.
 
  저는요,
  얕은 상처조차 없는 저는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연신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말짱한 가슴도 비워내려 하면
  그런 소리가 나는가 봅니다.
  바람 달래는 억새들의
  마른 몸부림 소리가.